오전 10시, 드디어 런던에 도착.
아직도 남미 여행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대륙을 건너왔다는 것이 잘 실감나질 않는다.
전화로 한국인 민박집을 예약하고 지하철을 타니
그제서야 비싼 런던의 물가와 함께 대륙이 바뀌었음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런던 외곽에 위치한 한국인 민박집까지의 지하철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편도 지하철 요금이 3.7 파운드, 남미에서의 하룻밤 숙박비를 훌쩍 넘어 버린다.
가뜩이나 비싼 유럽의 물가에 요즘 들어 급하게 올라버린 유로 환율까지,
앞으로의 유럽 여행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낮 열두시가 넘어서 겨우 민박집에 도착하였다.
런던에서 한국인 민박집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격 때문이었다.
저렴한 유스호스텔의 가격도 금방 20 파운드를 넘어버리는 이곳에서
15파운드(할인 기간이라 실제로는 13파운드)의 저렴한 숙박비와
아침,저녁으로 제공되는 한식은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게다가 젊은 민박집 주인장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고,
전직 호텔 요리사 출신인 탓에 음식 맛 또한 아주 훌륭하다 하니 런던에서의 체류가 사뭇 기대되었다.
깔끔한(?) 아메바는 도미토리가 깨끗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인지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시내 구경을 나섰다.
새로운 대륙의 첫날, 환경은 바뀌고 아직 적응은 되지 않아서 약간 멍한듯하며 영 편칠 않다.
지나온 남미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편리한 곳이지만 워낙 물가가 비싸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남미에서의 하룻밤 숙박비는 겨우 지하철을 한번 타는 값이고,
한화 400원 정도 하던 길거리 햄버거는 2파운드 (약 4000원)씩 이나 한다.
런던에서의 첫날은 비싼 물가를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낮의 해가 거의 다 기울어 갈 무렵,런던 중심의 거리를 천천히 돌아보지만 별로 재미가 없고,
시큰둥해진 아메바는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다.
늘 하던 대로…….., 마음이 즐거워야 여행이 즐겁다.
차려져 있을 맛있는 저녁을 떠 올리며 발길을 숙소로 돌린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아메바의 얼굴이 금새 환해진다.
한마디 더:
남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길, 여행 중 처음으로 인종 차별적인 대우(?)를 당했다.
브라질 리오의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가지고 있던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영국 항공의 직원에게 제시하였다.
우리가 가진 티켓은 세계 일주 항공권이라 모든 항공권이 한 권의 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의 일정은 런던에서 4,5일 정도 체류한 후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항공사 직원은 그러한 우리의 일정에 대해 필요 이상의 확인을 하려 하였다.
처음 질문은 왜 영국에 가려 하냐는 것이었다.
항공사 직원의 질문치고는 약간 이상하였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간단히 대답을 하였다.
- 영국엔 왜 가지요?
??. 여행 목적으로 갑니다.
- 영국에는 이전에 가 본적이 있나요?
?? 예. 십 여년 전에 한번…
- 영국엔 아는 사람이 있나요?
??? 아니요. 그저 여행을 하러 가는 것인데요.
- 얼마나 머물죠?
??? 탑승 수속할 때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 이것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 4,5 일 정도.
- 나오는 비행기 티켓은 있나요?
우리의 티켓을 보면 알겠지만 런던에서 모로코로 가는 티켓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묻지요?
- 모로코로 갈 것이면 바로 가도 되는데 왜 런던을 경유하지요?
??????
그제서야 우리는 흑백 혼혈의 항공사 직원의 태도에 동양인을 깔보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실제로 런던의 입국 심사 시에는 간단한 일정 확인과 비행기 티켓 확인뿐이었던 것을 비교하면,
출발 전 항공사 직원의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은 동양인에 대한 무시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대방의 무례를 확인한 우리는 직원에게 항의를 하였다.
어떤 의도로 우리에게 그런 필요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인지, 왜 그런 사항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질문 시의 태도는 승객에 대한 기본적 예의도 갖추지 않은 아주 무례한 것이었으니 사과하라고 요구하였다.
우리의 항의에 다소 당황한 직원의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간단히 미안하다는 말뿐 사과다운 사과는 하지 않았다.
창구가 다소 소란스러워지자 그제서야 주변의 직원들이 나서며 대신 사과를 하며 우리를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정작 무례했던 직원은 별반 사과의 기색도 없었다.
그런 소란 후,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 내 영국 항공의 고객 서비스 센터로 가서 정식으로 항의를 하였다.
그리고 고객 불편 신고 양식을 받아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우리가 당한 일이 불쾌하고 어처구니없고 더 이상 상대하는 것이 귀찮긴 했지만
무례한 직원의 태도는 고쳐야 했기에 양식을 작성해 신고할 작정이었다.
막상 인종적인 편견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런 편견은 단순한 무례함에 대한 화를 넘어서 그 사람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상대방의 태도를 고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도저히 상대할 가치마저 느끼기 힘든 일이었고,
나를 무시하는 상대방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문득, 여행 전 우리나라의 티브이에서 보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어려움을 다룬 프로그램이 떠 올랐다.
그리고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인 편견이 느껴져 부끄러운 감정이 생긴다.
불과 몇 십년 사이에 경제적으로 앞서게 된 한국,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은연중 동남 아시아, 중동, 혹은 인도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우리의 잘못된 편견을 실감조차 못하고 있어,
우리의 편견을 고치는 것 자체도 커다란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을 여행하려는 우리보다 검은 피부색의 여행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시내 한가운데의 식당이나 술집에서 동남 아시아인들이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편하게 즐길 수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근로자들은 과연 그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자각하지 못한 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편견은 심각한 수준인 것 같았다.
심한 차별을 받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제 막 살만 해진 한국인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 한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까?
분단된 현실 탓에, 실제로는 섬과 다름없는 곳에서 우리끼리만 살아온 우리들,
우리가 가진 인종적 편견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그리고 고치지 않고 비뚤어진 채로 굳어져
인종적 편견을 가진 사람들로 굳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착잡한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한번 더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체크인하며 항공사 직원과 한참을 싸운 데에 대한 아주 치사한(?) 보복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좌석은 그 큰 비행기의 수많은 좌석 중, 맨 뒷좌석.
좌석이 뒤편의 벽과 바로 붙어있어 거의 젖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 뒤 상파울로를 경유해가는 비행기라 좌석의 칠팔십 프로가 비어있는데도
맨 뒤의 가장 불편한 좌석을 배정해준 것이었다.
리오에서 탑승한 승객들 중, 우리 단 둘만.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온다.
옆의 아메바는 어이없는 항공사 직원의 보복에 분개하며 인종적 편견에 한바탕 더 비난을 쏟아낸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잘못된 편견도 바로 고치자고……..
우리도 보복의 칼(?)을 꺼냈다. 뒤로 젖혀지지 않는 의자에 앉아 고객 불편 신고 양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보복 수단, 글씨의 크기를 줄여 써가며 칸을 가득 채웠다.
한참 뒤, 비행기가 상파울로에 도착하자 이내 좌석은 모두 다 차버리고………
이후 열 시간 가까운 비행 시간 동안 아주 곧고 바른 자세(?)로 여행을 해야만 했다.
작성한 양식을 손에 꼭 쥔 채로…….. 우리의 보복이 성공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