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잠시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날이 아주 좋다.
그리고 산속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하다.
아침 6시, 일찍부터 짐을 챙기고 첫번째 등산 열차를 타기위해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 돈으로 십 오만원이 넘는 등산 열차의 요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기위해 조조 할인이 되는 첫 기차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알프스의 풍경이 아주 시원스러워,
요금때문이 아니더라도 첫 기차를 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라켄에서 출발한 기차는 라우터 부르넨에서 우리를 태우고 융프라요흐를 향해 올라간다.
날이 맑아서 그런지 푸른 산의 빛깔이 더욱 푸르게 보인다.
알프스의 산자락을 돌아 1시간 정도를 달리고, 6시 55분에 출발한 기차는 8시경에 설산의 바로 밑,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 도착하였다.
해발 2천미터가 조금 넘는 클라이네 샤이덱, 기차를 내리자 눈으로 완전히 뒤덮힌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위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만년설로 뒤덥혀 새하얀 모습이고, 그 바로 밑으로는 산등성이의 짙푸른 초원이 이어진다.
게다가 그 뒤로 보이는 맑은 하늘빛도 아주 곱다.
설산의 흰색, 초원의 짙은 녹색, 그리고 푸른 하늘빛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중간 중간 보이는 알프스의 집들은 주변 경관과 어울려 바로 엽서의 한 장면이 된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잠시 머문 후,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기차의 레일도 바뀌어, 레일의 중간에 톱니 바퀴로 맞물려진 레일이 하나 더 있다.
철커덕거리는 톱니 바퀴 소리를 들으며 1시간 가까이를 더 올라서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상 부근에 가까워 졌을 무렵에는 기차가 완전히 얼음으로 이루어진 굴도 통과한다.
드디어 융프라우요흐 정상, 해발 3,454 m, 관광 안내소에서 받은 안내책자의 표현을 빌자면 ‘유럽의 정상’ (Top of Europe) 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으로 기차를 내리자 바로 전망대로 이어진다.
전망대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안쪽의 매점에 한글로 ‘사발면’이라고 붙여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한국산 사발면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된 정상 부근을 기차를 타고 통과하느라 몸이 으슬으슬 춥던 터에 사발면을 보니 참을 수가 없다.
가격은 한 그릇에 무려 7프랑 (약 7천원), 비싸서 한 그릇을 둘이 나누어 먹기로 했다.
하지만 둘이서 사발면 하나를,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깨끗이 비우고 금새 젓가락만 쪽쪽 빨고 있다.
맛있는 라면 국물의 유혹에 못 이겨 그 비싼 것을 하나 더……
전망대의 밖으로 나가자 알프스 정상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의 주변도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 바로 앞에는 해발 4,158 m의 ‘융푸라우’가 보인다.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개의 봉우리들과 만년설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맑은 하늘빛도 곱고……
깨끗하고 상쾌한 하늘을 보니 문득, 남미, 볼리비아의 하늘빛이 떠 오른다.
산의 모습은 이곳 스위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해발 5천 미터에서의 하늘빛은 정말 굉장했었다.
알프스 정상의 하늘빛도 볼리비아의 짙푸른 하늘빛만은 못한듯하다.
아메바도 알프스의 하늘을 보며 볼리비아의 하늘빛을 더 그리워한다.
어느덧 시간은 11시를 넘기고, 벌써 정상에서 두시간 가량을 보냈다. 이제 기차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기차는 다시 철커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가고, 다음 역인 클라이네 샤이덱에 다와 갈 무렵, 창 밖을 보던 아메바가 갑자기 탄성을 지른다.
기차가 산비탈을 내려와 초원의 산등성이를 돌아나가자,
좀 전에 우리가 올랐던 봉우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해가 중천에 올라, 그 빛을 받은 눈 덮힌 봉우리의 모습이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고, 이제부터는 중간의 기차역까지 하이킹을 할 생각이다.
올라갈 때는 라우터 부르넨역에서 정상까지 동쪽편으로 기차로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서쪽 편을 통해 하이킹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알프스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내려갈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상쾌해진다.
클라이네 샤이덱의 기차역 뒤편으로 돌아 내려가며 하이킹을 시작한다.
대부분 초원으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간다.
길이 험하지도 않고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경관도 보기 좋아 별로 힘든 줄을 모르겠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중간 중간 반대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보이고, 길가에는 스위스의 농가의 모습도 간혹 보인다.
그리고 그리 넓지 않은 산길에는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소 똥과 염소 똥도 즐비하게 널려 있다.
그것을 피하며 걷느라 아메바의 발걸음이 무척 바빠졌다.
너무 잘 꾸며진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다던 아메바에게 그런 스위스의 모습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지려나?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다음 역인 브란데그까지, 천천히 걸으며 스위스의 산을 즐긴다.
우리가 하이킹코스를 잘못 택했는지 생각보다 훨씬 심심하긴 하지만
알프스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두어 시간을 걸어 브란데그역에 도착해서 기차에 올랐다.
역에는 우리처럼 중간에 내려 하이킹을 한 사람들도 몇 더 보이고, 짧은 산행이었지만 모두들 기분 좋아 보인다.
기차를 타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도중,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날이 궂어진다.
곧 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우리의 산행이 모두 끝난 후에 비가 내린다.
아직 산을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기차 밖으로 내리는 비가 아주 시원스럽다.
운이 좋아 하루 만에 융프라우요흐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으니 오늘 밤엔 다시 오스트리아행 밤차를 타야 할 것 같다.
밤차가 잦아 힘이 들긴 하지만 그것도 프랑스까지 만이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 더: 인터라겐 가던 길, 아침 일찍 쮜리히역에 내렸을 때, 우리의 눈에 비친 쮜리히역의 광경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역 내부가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여기 저기 쓰레기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루 뒤, 인터라켄을 다녀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는 밤차를 타기위해 쮜리히에 다시 왔을 때,
이번에는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가방을 도둑맞을 뻔하였다.
내가 기차 시각을 보려고 잠시 아메바와 따로 서있던 사이, 몇 명의 외국인들이 동시에 다가와 나에게는 기차 시간을 알려 주겠다고 접근을 하고,
아메바에게는 뭔가를 물으며 주의를 끌며 아메바가 지키고 있던 내 작은 가방을 들고 달아나려 하였다.
하지만 가방을 집어가기 직전, 뒤를 돌아본 아메바에게 일행 중 하나가 들키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던 놈을 포함해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아나 버렸다.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에게 접근했던 서넛이 모두 한패였음을 눈치 채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다시 역 주변을 주위를 둘러보자 곳곳에 그런 일행들이 꽤 많이 섞여있는 듯했다.
여행객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역을 배회하는 사람들,
우리의 추측으로는 그 중에 직업인(?)도 상당수 섞여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추측이 틀렸다 해도 역의 분위기는 순진한 여행자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십여 년 전, 유럽을 여행할 때 보았던 쮜리히역은 여러 도시 중에서도 아주 깨끗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늘 본 쮜리히역의 모습은 십여 년 전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역도 이전에 비해 많이 지저분해지고, 역의 분위기도 제법 험악(?)해져 있었다.
유럽에서 만난 두 번째 직업인(?)들, 덕분에 느슨해져 있던 우리는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