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빈의 중앙역에 도착하였다. 우선 숙소를 구해야 하는데 마땅치를 않다.
우리가 가진 가이드북은 영문판이라, 싼 숙소 정보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에 관한 것뿐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호스텔에 전화를 해보니 빈방이 전혀 나오질 않는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얻기가 힘들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을 보긴 했지만
지금처럼 장기 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일일이 일정에 맞추어 예약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보아도 빈방은 없고… 한순간, 나도 아메바가 되어버린 듯하다.
…………
아무 생각 없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도 옆의 아메바는 천하태평, 싱글벙글…… 하긴 얼굴 찌푸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한국인 민박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정보가 없다.
할 수 없이 다른 한국인 여행객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수 밖에………
한참 뒤, 막 기차에서 내린 다른 한국인 여행객 둘을 발견해 내었다.
마침, 그 일행은 한국인 민박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전화를 해 보니 다행히도 민박집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 두 아메바(?)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두 사람의 뒤만 졸졸 따라 간다.
늘 아메바를 데리고 앞장서 다녔는데, 막상 뒤를 따라다녀 보니 정말, 편하다.
이렇게 계속 여행할 수는 없을까?
지하철을 타고 한국인 민박집에 도착하였다.
이곳 민박집은 모두 도미토리 식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숙소의 상태가 가격에 비해 열악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으니 참아야 한다.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
짐도 풀고, 샤워도 하고 거의 점심 무렵이 다 되어 빈 시내 구경에 나섰다.
길을 나서자 마자 바로 시장기가 느껴진다.
늦은 아침을 민박집에서 컵라면으로 해결했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
도심의 대형 슈퍼마켓의 제과점 코너에서 빵과 우유로 간단히 처리하였다.
오늘 저녁은 모처럼 빈 외곽의 식당에서 제대로 먹을 예정이라 과식은 금물이다.
저녁을 위해 약간의 시장기를 유지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받은 지도를 보며 천천히 걸어 호프부르그 왕궁을 향해 간다.
왕궁으로 가던 길, 자연사 박물관과 역사 박물관 앞을 지난다.
우리 둘은 박물관을 소 닭 보듯 쳐다본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박물관이 예쁘군.”
박물관을 지날 때, 박물관보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두 박물관 사이에 세워져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청동상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이후, 유럽의 강자로 떠 올라 중세를 호령했던 합스부르그 왕가,
그리고 18세기경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여자의 몸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여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희생자가 된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광장의 중앙에 당당히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과거 번성했던 합스부르그 왕가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발길을 돌려 다음은 호프부르그 왕궁, 현재 빈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합스부르그 왕가 시대의 유적이라고 하는데,
이곳 역시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합스부르그 왕가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궁전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에 걸맞게 화려하고 아름답다.
왕궁의 주변에는 음악의 도시답게 각종 음악 공연의 티켓을 팔려는 삐끼(?)들이 많이 보인다.
중세의 복장을 멋지게 차려 입긴 했지만 능청스러운 모습은 다른 관광지의 삐끼들과 별반 틀리지않다.
박물관을 안가니 역시 시간 여유가 많아진다.
천천히 빈 시내를 돌아보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가온다.
옆의 아메바는 벌써부터 들떠있다. 여행 중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먹는 즐거움이다.
낯선 음식에 도전하는 것도 재미있고, 그 와중에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되면 아주 흐믓해진다.
게다가 각지의 이름난 음식들은 대부분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오늘 저녁, 우리가 가는 곳은 빈 외곽의 ‘그린칭’ (Grinzing) 지역으로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의 언덕 정상에 올라 빈의 야경을 볼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먹어 보려는 것은 ‘호이리게’(Heurigen),
‘호이리게’란 빈 근교의 포도밭에서 그 해에 딴 포도를 가지고 만든 햇 포도주, 혹은 그런 포도주를 파는 식당을 일컫는 말이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그런 식당 중에 직접 포도밭을 가지고 재배하는 식당에 한해
식당 입구에 푸른 소나무 가지를 걸어 놓을 수 있도록 승인을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 입구의 푸른 소나무는 ‘호이리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린칭 지역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솔가지가 걸려진 식당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주변의 식당은 모두 고만 고만하고 솔가지가 걸린 것 만으로는 어느 식당이 좋은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늘 하던 방식대로 식당을 골라내었다.
– 식당들의 주변에 서서 어느 식당으로 가장 손님들이 많이 들어가는지를 보는 우리의 방식: 음식의 종류를 막론하고 맛이 좋은 식당에는 손님이 항상 많다.
그렇게 찾아낸 식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손님이 유독 많은 것이 맛좋은 식당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스트리아 음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친절한 종업원에게 호이리게와 잘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방법 역시 낯선 음식을 먹을 때 아주 유효한 방법이다.
잠시 후, 호이리게, 백 포도주 두 잔이 우리의 테이블로 나온다.
묵직한 맛은 없지만 달콤한 맛이 강하고 신선해 햇 포도주의 맛이 잘 느껴진다.
술 약한 아메바의 얼굴이 금새 붉게 달아오른다.
한참 뒤, 나온 요리는 맛있는 소스가 뿌려진 ‘버섯 복음밥’과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담겨 나온 일종의 모듬 구이.
소, 닭, 돼지 고기가 한 점씩 그리고 소시지와 스니쩰 (오스트리아식 돈까스?)이 하나씩 들어있다.
둘 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이었지만 맛은 아주 좋았고, 특히 달구어진 용기에 담겨 나온 고기는 식사 끝까지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다.
모처럼 마시는 포도주에 얼큰해지고, 맛있는 오스트리아 음식에 취해 둘 다 흐믓해졌다.
포도주를 잘 모르는 우리지만 처음 먹는 호이리게가 상당히 좋다.
포도주를 잘 모르면 어떤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걸.
한시간 후, 우린 근처 숲의 정상에서 빈의 야경을 보았다.
아름답기로 이름난 빈의 야경이라지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저녁에 먹은 맛있는 요리와 호이리게만 자꾸 생각 날 뿐……
한 마디 더: 장기간의 여행 중에는 숙박비든, 식비든 간에 조금만 격(?)을 높여도 추가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배낭 여행객들은 식사를 할 때, 주로 싼 식당이나 길거리 음식을 자주 이용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식성이 꽤 좋은 우리 둘은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음식이나 맛있다고 알려진 음식을 보면 제법(?) 과감히 투자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곳 유럽에서는 그런 투자가 쉽지 않았다.
기본 물가가 워낙 비싸 깔끔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금새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마음먹고 식당을 찾아가는 날이면 아주 심한 불균형(?)이 발생하곤 한다.
점심으로 도심의 슈퍼마켓에서 산 빵과 우유의 가격은 모두 합쳐 약 1.9 유로,
그것을 제과 코너에 앉아 먹었으니 둘의 점심 비용은 1.9 유로 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 물이나 다른 음료를 먹지 않았는데도 포도주를 포함한 가격은 32유로……
1.9유로의 점심과 32유로의 저녁.
물론, 오늘 점심은 유럽 여행 중 가장 싸게 먹은 경우이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엄청난 불균형이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어이 없을 때가 가끔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