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이틀째 날, 어제부터 시무룩하던 아메바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워낙 훌륭한 식성을 지닌 터라 먹을 것만 잘 주면 아무런 불만이 없던 아메바,
식욕과 컨디션이 정확히 일치하던 아메바가 이상해졌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두 끼 연달아 맛있는 식사를 했는데도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인다.
민박집 주인장의 음식 솜씨는 상당한 (?) 경지에 달한 수준이었고, 실제로 나와 아메바 모두 아주 맛있게 식사를 했는데………
지나온 남미 대륙에서는 보는 것마다 즐거워하며 여행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이곳 런던에서는 영 의욕이 없어 보인다.
학창 시절 배낭 여행을 했던 나와는 달리
아메바는 런던이 처음이라 상당히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유럽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거리의 건물들과 잘 관리된 도심의 공원이나 광장등에도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연신 남미가 그립다는 말만 되 뇌이고…….
피카딜리 서커스와 트라팔카 광장을 지나 차이나 타운인 소호 지구에 들어선 후에도
길거리의 비싼 햄버거를 보며 연신 불만만 터트린다.
차이나 타운에서 볶음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하루 종일 시무룩, 혹은 무덤덤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남미의 낙후된 도시들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건물들의 보존 상태도 훨씬 좋아 아름답지만
아메바는 그래도 남미가 훨씬 좋았다며 계속 시무룩하다.
가이드북에 나온 유명 관광지들을 덤덤하게 돌아보며
런던의 명물 빨간 버스를 타고 ‘빅벤’을 보기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느덧 해는 저물기 시작하고 빅벤은 좀더 어두워진 후, 야경을 겸해 보기로 하고 먼저 웨스터 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하니, 벌써 문을 닫은 뒤이다.
개방 시간을 미리 확인 안하고 무턱대고 와버린 것이다. 아쉽지만 겉 모습만……
문이 열려 있었다 해도 입장료 때문에 고민을 했을 텐데, 고민이 하나 준 셈이다.
영국 왕실의 공식 사원인 웨스트 민스터 사원,
11세기에 지어진 이후 왕실의 대관식이나 각종 공식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겉 모습이 그런대로 아름답다.
우리처럼 시간을 못 맞춘 관광객 몇 사람과 더불어 천천히 주위를 돌아 보았다.
아메바는 여전히 시무룩하게 사원을 돌아보고……
사진을 찍느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보니, 항상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르던 아메바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둘러보니 혼자서 사원의 서쪽 문에 기대어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시무룩하던 아메바가 기운이 다시 살아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문에 붙여져 있던 사원에 관한 설명을 읽고 있다.
설명의 제목은 ‘20세기의 크리스챤 순교자들’,
사원 서쪽 입구의 문 위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20세기 순교자들 10 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밖의 문에는 그에 대한 설명을 붙여 놓았다.
1. St. Maximilian Kolbe (Polish Franciscan, executed in Auschwitz 1941)
2. Manche Masemola (Beaten to death for her faith, Sekhukhuneland 1928)
3. Janani Luwum (Archbishop of Uganda, assassinated 1977)
4. St. Elizabeth of Russia (killed by the Bolsheviks 1918)
5. Martin Luther King (Baptist pastor, civil right campaigner assassinated 1968)
6. Oscar Romero (Archbishop of San Salvador, assassinated 1977)
7. Dietrich Bonhoeffer (Lutheran pastor & theologian, executed by Nazis 1945)
8. Ester John (Evangelist in Pakistan, murdered 1960)
9. Lucian Tapiedi (kill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Papua New Guinea 1942)
10. Wang Zhiming (pastor & evangelist, killed in the cultural revolution, 1972)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제외하곤 대부분 낯선 이름이었지만 아주 경건해지는 순간이었다.
20세기의 순교자들, 순교라는 말의 느낌 때문인지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여러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위해 순교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죄스러움이 느껴진다.
문명의 시대를 살고있는 지금, 여전히 지구 곳곳에는 또 다른 순교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국 성공회의 웨스터 민스터 사원,
교파를 초월해 기독교와 핍박 받는 자들을 위해 순교한 성인들의 모습을 기리고 있는 사실에 막연한 감사함이 느껴진다.
웨스터 민스터 사원을 지나 빅벤과 국회 의사당의 야경을 보기위해 템즈 강변으로 가던 길,
국회 의사당의 바로 앞에는 거의 거지와 다름없어 보이는 두어 사람과 여기 저기 늘어져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사진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모습이었고…..
템즈강을 건너 멀찌감치 빅벤과 국회 의사당의 야경을 보는 동안에도 좀 전의 광경이 자꾸 떠 오른다.
사원의 20세기 순교자들의 모습과 이라크 어린이들의 모습이 묘하게 교차되는 느낌이다.
다시 빨간 이층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전히 시무룩한 아메바의 모습이 신경 쓰인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면 좀 나아 지려나?
한마디 더: 차이나 타운에서 ‘왕케이 식당’이라는 중국 식당을 보았다.
11년 전, 군대 제대 후 그 당시 흔치 않던 배낭 여행을 하며 싼 값으로 볶음밥을 먹었던 곳.
지금은 아주 유명해져 관광 명소 중의 하나가 된 곳이다.
가격이 싼 대신 서비스의 질이 낮아 종업원들의 불친절함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불친절에도 불구하고 식당은 여전히 손님들로 넘쳐 나고
값싸고 맛있는 음식은 여행객의 호평을 받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식사를 해 보진 못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싸게 주기 위해 비용이 드는 친절을 포기한 그 식당의 모습이 그리 싫지 않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