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박물관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다시 고대 로마를 찾아 나선다.
시작은 첫날과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광장이다.
버스에서 내려 캄피돌리오 언덕을 돌아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마르첼로 극장의 모습이 보인다.
콜로세움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콜로세움의 외형과 상당히 유사하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어느덧, 로마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테베레강이 나타난다.
강의 폭도 작고 수심도 상당히 낮아보여 상상했던 것에 비해 볼품이 없다.
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테베레강의 중앙에 떠있는 ‘티베리나’섬이 눈에 들어온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강 자체의 폭도 좁고 섬 자체의 크기도 워낙 작은,
양쪽으로 20여 미터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좁은 지역이다.
고대 로마 시절에는 의술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신전의 자리에는 교회가 들어서고,
대신 교회 맞은편에 병원이 들어서 있다.
고대 로마 시절에는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리면 이곳의 신전에 환자를 데려다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환자의 의지가 강해 스스로 건강을 회복해서 신전을 나오게 되면 살아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신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냉정한 듯하지만 로마인의 죽음에 대한 사고 방식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고대 로마인, 특히 로마 귀족들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하였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힘들어지고 자신의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지면
더 오래 살려는 미련을 버리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고대 로마인,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티베리나섬을 나와 근처의 산타 마리아 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자체보다는 영화에 나와 유명해진 ‘진실의 입’을 보기위해서 이다.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그곳을 빼놓을 수도 없고 해서………
다음은 성바울 성당, 성당 가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제, 바티칸 박물관에서 들었던 성화의 얘기도 재미있고 해서 성바울 성당이 갑자기 더 보고 싶었다.
막상 가보니 성당의 규모나 내부의 모습은 성 베드로 성당보다는 못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관람객으로 인해 성당이 조용해서 느낌이 훨씬 좋다.
게다가 가는 길에 우연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어 초라해진 모습이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로마의 성벽을 따라 잠시라도 걸어보는 것이 그런대로 재미가 있다.
성바울 성당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도심으로 들어간다.
로마에 오면 꼭 보고싶던 것 중의 하나였던 판테온,
버스를 내려 골목길을 돌아 한참 들어가자 광장이 나오고 판테온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학교 미술 시간, 석고 데셍 연습시 보던 바로 그 ‘아그리파’에 의해 처음 지어진 신전이다.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던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카이사르는 ‘아그리파’로 하여금 그의 후계자를 수행토록 하였다.
그러한 카이사르의 배려는 적중하여, 아그리파는 일생동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오른팔이 되어
수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며 로마의 제정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두 차례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천사가 지은 것이라 극찬했던 바로 그 ‘판테온’이다.
내가 이곳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판테온’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만신전’인 이곳, 수많은 신을 섬겼던 로마인들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 패배자들을 로마화하여 동화시키려 하였으며 패배자들의 신마저 받아들이곤 하였다.
그런 ‘판테온’을 통해, 하나의 신전 안에서 여러 신을 동시에 보며 로마의 다신교의 전통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외부의 모습은 원형 그대로인 듯 했지만,
중세의 기독교 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독교의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내부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내부를 돌아보니 돔으로 이루어진 내부 구조가 훌륭하게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신전의 한편에는 카톨릭의 제단이,
그리고 로마의 신들이 있던 자리에는 카톨릭의 성인들과 중세의 대주교의 조각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천년이 넘는 카톨릭의 시대를 거치고도 로마의 신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한 내가 너무 어리석었던 것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로마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누에바 광장을 돌아 ‘산탄젤로 성”(천사의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원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묘지였으나, 6세기말 로마에 페스트가 유행할 당시,
황제가 페스트의 퇴치를 위하여 기도를 하던 중에 천사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후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천사가 나타났던 곳에는 황제의 동상대신 천사의 동상이 세워지고,
황제의 묘지 위에는 교회가 세워져 ‘천사의 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묘지를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붉은 빛의 황제의 묘를 밖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묻힌 곳을 직접 보는 것이라 제법 즐겁다.
어느덧 한낮의 해가 서서히 식기 시작하고, 오늘의 로마 시내 구경은 이것으로 끝낼 참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오후에는 로마 외곽의 ‘아피아’ 가도를 가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로마의 도로망, 그 수많은 로마의 가도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워낙 긴 시간이 지난 후라 얼마나 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로마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로마 가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 꼭 보고싶었다.
대부분의 다른 로마 가도는 현재의 이탈리아 도로망의 일부가 되어버려 과거의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관광 안내소에서 미리 확인해 둔 ‘아피아’ 가도행 버스를 타고 로마의 외곽으로 출발이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좁은 도로가 이어지고 도로 표지판에 적힌 ‘아피아 가도’란 글씨가 우리를 벌써부터 설레게 한다.
기독교도들의 유적지인 카타콤베를 지나 한적한 도시의 외곽에서 버스를 내렸다.
버스 안의 승객에게 물어보고 내린 것인데 주변에 로마 가도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넓은 벌판의 모습만 보인다.
한참을 걸어 이전의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서있던 길도 지도상에는 아피아 가도라고 적혀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보려고 했던 모습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한참을 헤매었지만 기대했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서있는 도로의 모습은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돌로 깔린 길일뿐 로마 가도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망스럽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이뿐이라면 할 수 없는 일………
어느덧 저녁 시간도 다가와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차를 타기위해 버스 정류장을 묻던 중, 한 현지인이 우리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아피아 가도를 찾는 중이라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며 방향을 가르쳐 준다.
순간, 그 이탈리아인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로마 가도를 제대로 못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다시 발길을 돌려 아피아 가도를 찾아 나선다.
약 20여분을 더 걸어가니 우리가 기대했던 로마 가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도가 시작되는 곳에는 가도의 보존을 위해 차량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곧고 길게 뻗은, 돌로 잘 포장된 도로와 양 옆의 보도, 그리고 길게 늘어선 가로수,
아피아 가도는 우리가 기대했던 바로 그 로마 가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을 사용해 완전히 포장되어진 로마 가도,
10여 미터가 좀 더 되는 너비의 도로와 그 양편으로 포장된 도로보다도 삼,사십 센티미터 정도 높게 보도가 놓여져 있다.
보도와 도로 사이에 있었을 배수로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우리의 안목으로는 구별 할 수가 없었다.
길게 이어져 있는 가도는 얼마나 걸어야 끝에 다다를지 가늠이 잘 안 된다.
곧게 뻗은 가도의 모습은 너무나 시원하고, 차도 없는 가도의 중앙을 천천히 걷고 있으니 기분이 너무 차분해진다.
지난 세월을 말해 주듯 커다란 돌로 포장된 길이 중간 중간 아주 깊게 패어져 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가도를 보호하기 전에 지나다닌 차들로 인해 가도가 손상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나마라도 보존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돌로 된 가도의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아 기념 사진도 한 장,
훌륭한 나의 찍사(?)는 연신 내 모습과 가도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바쁘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
말이나 마차만이 도로를 이용하고 길을 걷는 행인들은 길 양쪽의 보도를 이용하여야 했다.
단 한가지 예외, 로마 군단의 군단병들이 이동할 때에는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 전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해주던 가도망,
이 모든 것은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 군단은 전쟁을 하는 경우에도, 단 하루를 머무는 숙영지조차
임시 막사가 아닌 제대로 된 군단 막사를 건설하고 나서야 숙영을 하였다고 한다.
훌륭한 전사 집단이자 기술자 집단이었던 군단병들은
정복한 지역에 스스로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며 로마 가도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넓은 길을 내고 마는 것도 아니었다.
길을 돌로 포장을 하고, 보도를 만들고, 그 사이에 배수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야만 로마 가도는 완성이 되었다.
이러한 로마의 군단병들 덕에 로마의 훌륭한 도로망은 완성이 되었고,
로마 군단이 머물렀던 군단 기지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때 도시의 기반 시설로,
그리고 도시에 정착하는 경험 많은 퇴역병들은 숙련된 기술자가 되어 훌륭한 도시들을 건설해내었던 것이다.
저녁 무렵의 아피아 가도, 차도 다니지 않고, 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간혹 보일 뿐,
한가한 가도의 모습이 너무나 고즈넉하다.
양편 보도의 바로 뒤에는 다시 길을 따라 수많은 크고 작은 비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대 로마인들은 산 사람들과 따로 떨어진 묘지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묻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죽은 뒤, 길가에 자신의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에는 산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혹은 세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의 묘비명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가도를 따라 여행을 하던 나그네가 비석의 곁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면,
묘비명을 보며 잠시 한가한 상념에 잠기곤 하였을 것이다.
우리도 잠시 길가의 비석 옆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비석에 적혀있는 글을 알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해는 완전히 기울어 어둠이 완연해진다.
30분을 넘게 가도를 따라 걸어 지치고 힘들 무렵, 겨우 아피아 가도의 보존 구역이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피아 가도를 직각으로 가로지르는 아스팔트길이 놓여져 있다.
가도를 가로지르는 이 길이 아쉽긴 하지만 우리도 이길 때문에 버스를 타고 로마 시내로 돌아갈 수 있으니………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로마 외곽의 벌판, 한참을 기다려 겨우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 다니고 저녁 내내 아피아 가도를 걸어 다니느라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벌써 다음엔 언제 또 이곳에 와 볼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그 때까지도 무사히 잘 보존이 되어야 할텐데……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린 둘 다 연신 꾸벅거리며 졸고 있다.
한 마디 더: 아피아 가도를 돌아보는 동안, 차량 출입 금지 표시에도 불구하고 몇 대의 차량이 도로로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순간, 우린 몰상식한 관광객들인 줄로 알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가도의 군데 군데 깊게 파인 부분에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상태였는데,
진입 금지 표시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를 보자 너무나 화가 났다.
지나가는 차의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참 뒤, 가도 주변의 한 주택 앞을 지나다 좀 전의 몰상식한(?) 차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가도의 주변에 지어진 주택에 살고있는 현지 이탈리아인들로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가려면 아피아 가도를 이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집으로 가는 진입로가 아피아 가도라서 불편한 도로를 보수도 못한 채, 그대로 이용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도를 보존하느라 오히려 자신들의 불편함도 감수하는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하다니………
우리의 성급함이 창피해진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