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벌써 4일째 로마를 돌아보고 있지만
보고싶은 것들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나 부족하다.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서만은 로마의 유물들을 국립 박물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안 날듯하다.
어제는 아피아 가도를 갔다 오느라 10시가 넘어 돌아왔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친절한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시는 저녁까지 먹었다.
그리고 로마의 아이스크림까지………. 그 바람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버렸다.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10시가 다되어서야 숙소를 나섰다.
로마에 오면 꼭 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는 고대 로마의 ‘인프라’ 였다.
로마의 시스템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는, ‘로마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수도(水道),
그리고 로마 제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던 로마 가도를 직접 보고 싶었다.
고대 로마의 건물과는 달리 수도와 도로는 지금 까지 그대로 남아 있기가 더 힘든 것들이었지만 그 흔적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커다란 대욕장을 보고 싶었다.
고대 로마 시절, 전시가 아닌 평상시의 황제의 가장 큰 임무는 인프라의 구축과 유지 보수였다.
그래서 도시의 시민들이 늘어나면 그들을 위한 포룸을 세우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 로마 가도를 건설하고,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위한 수도를 건설하는 것은 황제의 아주 기본적인 책무였다.
그리고 수백 년 이상을 사용하는 수도와 가도, 공공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 일은
황제로서 사명감이 없으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인프라는 시민들의 생활에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로마 가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수도는 시민들이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날마다 신선한 물을 공급하여 주었다.
의술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일반 서민들의 위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이었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병에 걸리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시의 외곽의 깨끗한 수원지에서부터 수도를 건설하여
짧게는 십수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수십 킬로미터를 신선한 물을 끌고 와서는 도시의 곳곳에서 물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지금처럼 펌프를 이용한 것도 아닌데도 자연적인 수압만을 가지고 필요한 수압을 유지하면서,
도시 곳곳에 그런 수도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지금부터 2천 여년 전에………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로마 시내에서 수도나 수도교를 보는 것은 실패했다.
관광안내소에 문의를 해도 잘 확인이 안되고,
이제 로마에서 머무는 시간도 다 지나버려 아무래도 수도의 모습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남부에는 아직도 로마의 수도교가 잘 남아있는 곳이 있다고 하니 다음으로 미루어도 괜찮겠지.
대신 이번에는 로마의 대욕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콜로세움 근처의 ‘카라칼라’ 대욕장, 카라칼라 황제에 의해 세워진 대규모 공중 목욕탕이다.
출발 전, 한 여행 책자에서 엄청난 규모의 로마의 공중 목욕탕을 두고서 로마의 사치스러움의 상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이 심해진 로마 제국의 후기를 제외한다면,
실제 로마의 대욕장은 사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고대 로마의 복지 수준의 상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좋아한 것 두 가지, 포도주와 목욕이다.
포도주를 좋아해 식사 때는 항상 포도주를 곁들여 마셨다고 하며,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적과 싸우기 위해 나설 때에도 항상 포도주를 가지고 다니고,
군단 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목욕 시설은 잘 갖추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 로마인의 공중 목욕탕은 대표적인 시민 편의 시설로,
하루의 일을 마친 로마 시민들이 저렴한 요금으로 목욕을 즐기며 그날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자신의 집에 좋은 목욕 시설을 갖출 수 없던 일반 시민들에게
훌륭한 공중 목욕탕은 사치가 아닌 필수적인 복지 시설이었다.
실제로 황제들은 시민들을 위해 좋은 시설의 공중 목욕탕을 지으려 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대형 목욕탕의 구조를 보면 온탕과 냉탕뿐 아니라, 중앙에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마사지실,
그리고 아름다운 조각상과 분수 등으로 꾸며진 휴식 공간, 심지어는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다.
안으로 들어가서 본 카라칼라 대욕장의 규모는 단순한 공중 목욕탕이 아니고 커다란 체육관 정도의 규모였다.
건물이 대부분 무너져 그 윤곽만 남아 있지만,
온전했을 그 옛날의 공중 목욕탕이 얼마나 훌륭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건물의 한쪽 구석에는 대욕장의 벽면을 장식 했을 아름다운 벽화의 파편들과 수많은 조각상들의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창 복원 중이던 다른 한쪽에서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을 볼 수 있었다.
사치스러웠던 로마의 유적을, 우리의 주관적인 시각 탓에 너무 좋게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 카라칼라 욕장 안에서 목욕을 즐기며,
도서관을 이용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장식된 공간에서 휴식을 취했을 로마인들을 생각해 보면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2천 여년이 지난 지금, 그런 복지 수준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커다란 대욕장을 돌아, 다음은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한다.
콜로세움 건너편에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 로마의 일곱 개 언덕 중의 하나로 황제가 살던 황궁과 귀족들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곳의 입장권은 콜로세움과 묶어서만 판매되기 때문에 콜로세움을 갔던 첫날 혹은, 둘째날 오전에 갔어야만 했다.
그런데 첫날은 박물관과 포로 로마노에서 너무 오래 머무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고,
둘째 날은 팔라티노 티켓은 까맣게 잊고 바티칸으로 갔다.
그 때문에 우리 티켓의 유효 기간은 지나버리고, 오늘 입장권을 다시 사야만 한다.
반쪽은 팔라티노 한곳만 보려고 비싼 티켓을 다시 사는 것은 아깝다고 투덜대지만
로물루스가 로마를 처음 세웠던 언덕, 로마 최초의 언덕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살았던 황궁도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 로마를 내려다 보고 싶었다.
팔라티노를 보고 난 티켓은 콜로세움만 보려는 한국 학생들에게 주면 될 테고……..
투덜거리는 반쪽을 달래며 팔라티노 언덕을 따라 올라가자 황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지어진 ‘아우구스투스 돔’과 ‘리비아 돔’, 황제와 황후가 기거하던 곳이었다.
두 곳 모두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작고, 워낙 오래된 건물들이라 대리석들도 모두 떨어져 나가는 등,
폐허에 가까운 상태라서 황궁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로마의 황제가 머물던 곳을 실제로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
폐허와 다름없는 건물이지만 그곳에 살았을 로마의 황제와 황후를 떠 올려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황궁의 건물들을 지나자 정원이 나타나는데 그 끝에서니 언덕을 따라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보인다.
황궁 곁에 지어진 로마 귀족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언덕의 반대편으로 가자 첫날 보았던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신전과 포룸들, 그리고 저 멀리 원로원 건물이 보인다.
첫날의 캄피돌리오 언덕의 반대편에서 보는 것이다.
그 옛날, 황궁에 살던 황제는 이곳에 서서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와 거리를 오가는 로마 시민들을 바라보며 국정을 구상하였을지도………
투덜거리던 반쪽도 실제 팔라티노 언덕의 모습에는 만족하는 듯하다.
언덕을 내려와 첫날의 ‘황제의 거리’로 다시 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을 다시 한번 찾아보기 위해……
한참 뒤, 마침내 카이사르의 동상을 찾아냈다.
주변에 세워진 네개의 동상 중, 흔적만 남아있는 카이사르 포룸 앞에 있는 동상이었다.
비교적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는지 대머리 카이사르의 모습이 확실친 않지만, 카이사르의 동상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안내 책자에, 동상이 카이사르 포룸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그 동상이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사르 포룸 앞에 다른 황제의 동상을 세워 놓을 이유도 없을 테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동상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로마 일정도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시내 중심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영묘.
힘들어 안 가겠다는 반쪽과 헤어져 혼자 지하철을 타고 영묘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아쉽게도 영묘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공화정 이후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트스가 묻혀있는 이 한적한 영묘를 돌아보는 기분이 좋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스위스로 가는 밤차를 타기 전, 120년 전통의 로마 아이스크림을 한번 더 먹으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
아메바의 한 마디 더:
이제 나의 로마인 이야기를 끝냈다.
재미있게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덕분에 우리의 로마 여행은 참으로 즐거웠고,
그 때문인지 세 차례의 여행기를 쓰는 동안 필요 이상으로 아는 척(?)을 했다.
책에서 보았던 곳들을 실제로 보면서 느끼는 감동에,
그때 그때 생각나는 이야기를 덧붙여 남기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나의 반쪽은 그 많은 잘난 척(?)한 내용 중, 틀린 내용이 있으면 어떡할 거냐고 구박이 심하다.
하지만 설혹 그런 부분이 있을지라도 로마의 이야기에 내 느낌을 솔직히 쓰느라 그런 것이니 좀 틀린들 어떠하랴.
아마 여행기를 읽는 분들도 어설픈 나의 잘난 척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아주지 않을까?
아님 말고~^^
끼룩이의 한 마디 더:
소문으로만 듣던 로마의 소매치기들, 로마에 있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로마의 소매치기들은 호기심(?)이 많은지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면 어김없이 내 가방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아마도 내 가방안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런 나를 두고 아메바는 무신경하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의 전대가 워낙 크고 두터워 통째로 빼가기는 불가능했고, 가방에 열쇠를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열쇠 채우는 일을 자주 까먹어 아메바의 핀잔을 듣긴 했지만…..
게다가 지하철을 탈 때마다 가방에 신경을 쓰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이 되도록 호기심 많은 로마의 직업인(?)들 덕분에 수차례 가방이 열리긴 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은 아침에 가방이 열렸어도 위협을 느끼기 보다는
엄청난 로마의 직업인들의 호기심에 대한 놀라움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로마를 떠나기 몇 시간 전, 아메바는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를 보고 싶다 하여 여행 출발 후 처음으로 둘이 떨어져 다니게 되었다.
나는 숙소에 가서 먼저 짐을 정리 하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던 중, 한번 더 직업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가방을 메고 있던 중, 뒤쪽의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 보니 뒤에 서있던 청년 둘이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얼굴을 보니 호기심이 많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내 가방은 어김없이 열려있다.
아, 이젠 가방을 다시 닫는 일도 지겹다. 제발, 내 가방에 대한 호기심을 좀 참아 주면 좋을 텐데…
가방을 다시 닫으려는 순간,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방 안의 전대가 보이질 않는다. 얼굴을 들어보니 상대가 어색하게 쳐다본다.
먼저 내 전대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치자, 직업인의 대답이 더 멋지다.
직업인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냐고 되물을 터인데, 없어진 것이 없을 테니 가방을 확인해 보라고 도리어 큰소리다.
고함 소리에 열차 안의 승객들이 모두 쳐다보고, 순간적으로 어찌할지 망설여진다.
그때 다행히 열차의 한쪽 구석에 경찰관이 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복을 입은 경관이 나서고, 나는 바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고 보니 대단한 직업 정신이다. 경찰관과 같은 열차에 타고도 일(?)을 하다니………
둘은 경찰관에 의해 다음 역에서 내리고, 그 역의 지하철역에서 바로 지원을 나온 다른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역 사무실까지 동행을 하였다.
그런데 그 둘의 몸을 다 뒤져도 전대가 나오질 않는다. 그제서야 둘이 길길이 뛰며 난리를 친다.
천천히 생각을 해보니, 아메바의 가방에 전대 두개를 함께 넣은 모양이다.
내가 가방을 잘 안 잠그는 것이 불안하다고 가끔, 아메바가 챙겼는데……
가방을 뒤진 것은 확실하고 전대의 행방은 아직 확인이 안 되어 아직 불안하다.
하지만 뒤져도 나오질 않으니……
경찰은 수 차례 확인을 더한 후, 두 청년을 풀어 주었다.
역무실을 빠져 나오자, 이번엔 아메바가 불안해진다.
남자인 나도 경찰관이 없었다면 쉽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아메바 혼자서 그런 상황을 당할까 봐 덜컥 겁부터 난다.
허둥지둥 지하철을 다시 타고 아메바에게로 간다.
20여분 뒤, 되돌아가던 길에 용케 아메바를 길가에서 다시 만났다.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돌아온 나를 보고 어안이 벙벙하던 아메바는 전후 사정을 들은 후, 대뜸 웃음부터 터트린다.
놀래서 달려오는 내가 그리 재미있나 보다.
다행히 전대는 아메바의 가방에 다 들어 있었고,
둘 다 무사(?)했기에 소매치기 사건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직업인들의 엄청난 호기심과 직업 정신엔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이제 제법 여행에 익숙해져 긴장이 풀어졌던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된 사건이었다.
